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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여행은 무엇입니까?

박현철 2008. 6. 10. 23:40

출처 : http://www.samsung.co.kr/news/biz_view.jsp?contentid=120139

누구에게나 여행은 새로운 만남과 볼거리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여행이란 말은 설렘을 동반한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양하다. 여행작가 채지형 씨에게 여행은 '없으면 안 될 생명수 같은 것'이자 '숨 쉬는 이유'이다.

호시탐탐 새로운 길을 탐하고 새로운 고장을 서성이는 이 지구별 이방인으로부터 여행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자.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은 어떤 것인지도 이 기회에 한 번 생각해보자. 


언제쯤이었을까. 코흘리개를 막 졸업할 즈음이었던가. 한참 동안 길을 헤매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께서는 "길 공부 잘하고 왔냐" 하시며 어깨를 다독거려 주셨다. 길을 잃어도 야단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날부터 아무 길이나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여행으로 점철된 짧지도 길지도 않은 개인사가 출발하게 됐다.

틈만 나면 새로운 나라에 스스로를 던져야 하고 36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돌아온 후에도 호시탐탐 길을 탐하는 지구별 이방인. 그런 나에게 여행은 수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카멜레온이자, 없으면 안 될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여행은......해결사?

누군가 '여행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해결사'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마지막 '사'자를 발음할 때는 약간 말꼬리가 올라가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해결사였다. 일상이 따분해질 때, 여행은 신나고 재미있는 모험이었다. 기차나 버스를 타기 위해 지루한 시간을 무작정 길에서 보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호기심 덩어리였다. 때로는 마음이 울적해질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 일단 떠나야 했다. 처음 밟아 보는 지구 반대편의 그 길은 언제나 생기발랄한 에너지를 안겨 줬다.

"여행을 가면 모든 것이 해결 되나요"라고 묻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아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짧은 여행은 언제나 해결사 역할을 해 줬지만 긴 여행은 꼭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일탈'이라는 속성 대신 '생활'이 되어 가기 때문이다.

대신 긴 여행에서는 그런 기대를 했었다. 일 년쯤 길에서 방랑을 하다 보면 생각도 깊어지고 웬만한 것에는 화도 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치 도통한 사람처럼 작은 일에는 연연하지 않는 '도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오니, 여행을 떠나기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하루는 너무나 짧았고 마음은 급했다. 그제야 알게 됐다. 자신의 마음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 다스려야 하는 것을. 여행으로 '나'라는 인간이 갑자기 성인군자가 되거나 하진 않는다는 것을.


여행은......동사와 형용사의 '리얼리티'를 경험하는 것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모든 여행은 충분히 재미있으니까. 특히 여행이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리얼리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가 막히다'라든가 '숨 막힐 정도의', '그림 같은' 이런 수식어와 머리에 입력되어 있던 대부분의 형용사와 동사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니터 앞이나 따뜻한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서는 절대로 그 맛을 알 수 없는 짜릿짜릿한 기운 같은 것들 말이다.

아프리카에 있는 킬리만자로 산에 오를 때였다. 별다른 준비 없이 그저 가이드와 포터를 믿고 산을 올랐다. 오만함 때문이었을까, 벌을 받은 것이었을까. 킬리만자로에 오르는 4박 5일간 잠을 못 잔 것은 물론이고 먹지도 못했다. 고산병에 걸린 것이었다. 날씨는 어찌나 그리도 추운지. 밤새 이를 딱딱 부딪치다 보면 턱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여행은 평상시 쓰던 많은 수식어와 동사의 의미를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산으로의 여행은 '탈진하다'의 동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때 이해하게 된 단어가 '탈진하다'였다. 그 평범한 동사가 어찌나 절절하게 와 닿던지. 온몸 구석구석에 있던 영양분들이 모두 빠져나가서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 그래서 생사가 오락가락한 그런 상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여행이 아닌 다음에야 '탈진'을 그렇게 경험해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여행은......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 했을 인연과의 만남

역시 여행의 효능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만남이다. 풍경은 굳이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TV나 스크린을 통해, 차도르를 쓴 이슬람 여인이나 아이를 들처 맨 아프리카 아줌마들의 체온을 느낄 수는 없다. 마음이 가난한 여행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현지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과 정이 듬뿍 담긴 눈빛. 그곳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나누지 못했을 만남들이 길 곳곳에 숨어 있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여행자들과 만나는 것도 행복했지만,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일어난 생각지 못한 만남들은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줬다. 터키 어느 시골이었던가. 힘들고 너무도 외로워서 버스에 자리를 잡자마자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잠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던 옆자리 터키 아주머니는 손수건을 건네더니, 어깨를 안아 주시며 토닥여 주셨다. 마치 엄마 품이라도 된 듯 그 아주머니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한참을 울었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따뜻함은 그 어떤 언어보다 강하게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티벳(왼쪽)과 시리아 알레포(오른쪽).
여행은 그곳에 있지 않으면 절대 경험하지 못할 체험을 안겨 준다.


여행은......빈약한 상상력과 편견을 깨뜨리는 작업

길을 나서면 언제나 머리를 숙이게 된다. 특히 빈약한 상상력을 돌아보게 될 때는 더욱 그렇다. 동물들의 왕국 탄자니아의 세렝게티국립공원에서였다. 날쌘 사자들이 몸을 날리면서 뛰어다닐 줄만 알았는데, 막상 가서 본 세렝게티의 동물들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보이지 않는 약육강식의 세계에는 다큐멘터리에서 본 쫓고 쫓기는 세상이 존재하겠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동물들의 세계는 너무나 편안했다. 얼룩말과 누 떼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들은 "너 여기 뭐 하러 왔니? 너 참 신기하게 생겼다"라고 말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나. 그들의 세상에서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는 그저 살짝 그들의 생활을 구경하고 가는 존재일 뿐이었다.

초원도 그렇다. 가기 전에는 '끝이 없는 초원쯤이야,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뭐가 다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초원 위에 서니 초원뿐만 아니라 얼굴을 스치는 초원의 바람과 공기가 기대 이상의 행복을 안겨 줬다. 역시 여행은 빈약한 상상력을 깨뜨려 주는 작업이자,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을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여행은......나를 숨 쉬게 하는 이유

여행은 스스로를 방전하고 충전하는 작업이다. 여행은 수많은 눈빛의 스침이다. 여행은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자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것이다. 나이쯤은 훌훌 던져 버릴 수 있는 통쾌한 시간이다. 그리고 여행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여행에 대한 정의 중 딱 하나만 꼽아 보라면, 바로 여행이야말로 나를 숨 쉬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답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함으로써 내 삶은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고 시나브로 여행을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이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떠날 곳을 2~3개 정도는 준비해 놓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가방을 챙긴다.

그러면 하루하루를 사는 일상도 특별해진다. 내 인생에 상관없어 보이던 멕시코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냥 스치는 인연도 한 번쯤 더 돌아보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든 무엇을 보든 순간순간 깨어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 가끔 여행을 삶처럼 살고 있는 것인지, 삶을 여행처럼 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곤 한다.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에 세워진 대도시 팔미라.
여행은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가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하는 타임머신과도 같다.


- 글

채지형 / 여행작가 http://www.traveldesigner.co.kr <지구별 워커홀릭> 저자